삼척 산양 농산촌 체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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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명 유래

산양리는 원래 “상양(尙陽)”으로 속칭하였는데 이것이 “축천․추천(杻川;살양․살래)” “산양(山陽)” 등으로 되었다. 일설에는 싸리나무가 많고 내(川)가 있으므로 “쌀내”라고 했다가 “축천”으로 부르다가 산양(山陽)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꽃거리(花街)․고직리(古直里)․천촌(川村)․살령(山陽)․종형(鍾懸;북두링잇골)․삽싯골의 6개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축천리로 불러오다가, 1996년 산양리(山陽里)로 개명했다.  동쪽에 천마산(天馬山)․북쪽에 용암산(龍岩山)․남쪽에 증봉(甑峯)과 서쪽에 창령(蒼嶺)이 우뚝 솟아있고, 그 사이에 가곡천은 기곡리로부터 흘러내려 사곡천과 합하여 노경리로 흘러간다.

산양2리는 크게 꽃거리(화가), 샛말, 종현동(북다리), 고직(고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종현동은 샛말(사잇말)을 경계로 꽃거리와 분리되어 있다. 즉 종현동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의 마을이 꽃거리로 가곡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종현동으로 들어가면서 샛말이 있고 이어서 종현동 긴 골짜기가 이어진다. 고직은 꽃거리에서 강(가곡천)건너로 자리잡고 있다.
산양 2리는 민씨보다 초계 주씨가 먼저 들어 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없다.

마을의 전설

<산양서원 묘정비(山陽書院 廟庭碑)>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산양리 843에 위치한 산양서원, 묘정비(山陽書院廟庭碑)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이다. 이곳에서 산양리 주민들에 의한 산양서원 황희선생제향제가 열린다. 산양서원은 조선시대 문신 황희(黃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발전한 것으로, 1857년(철종 8)에 건립되었다. 1423년(세종 5)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황희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삼척지방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하였다. 1516년(중종 11) 4대손 황맹헌(黃孟獻)이 이곳에 비를 세웠고, 풍우로 무너진 것을 1578년(선조 11)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다시 세웠다. 1824년(순조 24) 사림(士林)에서 소동사를 세웠고, 후에 산양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칠성대>
“칠성대는 왜서 칠성대나 이래면 전주 이씨에 낙향 할아버지가요. 여기 참 마을 정착해 가주고 뭐이가 뭐 자기에 참 그분이 어떤 소망을 이루고자 했는지 그거 잘 알 수 없으나 하데 칠성당을 이 산 뒤에 칠성대라는 거다가 칠성당을 모아놓고 에 공을 드렸답니다. 그래서 그 공드렌 칠성당이 그 흔적이가 지금도 아직까지 남아 있대요. 있는데 그래서 그 산을 칠성대라 이래 가지고 지금꺼진 칠성대라 부르지요.” “장수 발자국이 있는 걸…”(장수 발자국이 있어요 거기?) “발자국이 있어. 발자국이 있어.” “그래이 이 그분이가 저저 무관이죠 장수 장수.”
용암산은 옛날 아주 옛날에 말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거게 큰 물길이 글로 들어와 가주고 쏘이 글로 들어와 가주고 전설상에 명주꾸리가 하나 들어갔답니다. 그렇게 깊대요. 수심이가, 깊었는데, 쏘 가에 마구 할머니라고 할머니가 빨래를 했답니다. 빨래를 했는데 쪼그마는 어린이가 따라와서 놀고 이래니 애가, 그 때에 용이가 지금도 가면 용암산에 바위가 구멍이가 직경이 1미터 50되는 큰 구녕이 뚫려 있어요. 용이 구녕을 뚫는데 아가 자꾸 우니까 이 마구 할머니가 ‘야야 저 용봐라’이랬으면 그 구녕을 다뚫고 하늘로 등천을 했을긴데 ‘야 구리이 봐라’이랬답니다. 그래노이까네 그마 하늘에 노성벽력이 일어나면서 마 그 용으는 쏘에 떨아져 죽고, 말이 왈 ‘여기 구녕을 완전히 뚫고 용이가 등천을 했으면은 여기가 서울이 될 것이다’ 그런 전설이가 내려오고 있어요.”
<축지법 이야기>
“여여 옛날에 여여 우리 송구장 할아버이 말이여. 그 할아버지가 의병 때에 일군(일본군)이 쳐들어 오니까네 뭐 상바아 있다가 상방서 이래 보니까 삽작거레 들어오는 거 보고, 안에 문을 따가주 까치구녕으로 저 칠성대 올라갔다고 그런 차력 하니까 축지법 날아갔다 이거지.”
“용암산에 말이여 그 저저 기우제 지내 거기에. 이 축지법 하는 문서가 있었지요. 있는데 있었는데 그 그 때 후극이 뭐 이패들이야. 이패들이 가갔구 보이끼네, 당초에 그래 축지법 공부하는 장소지. 으른들이 거서 축지법 공부를 했는데 그 책 있는 거를 사람들이 갔고가 가마이 두면 될긴데 만져노이 오래되이끼네 조오가 막 삭아서.”